14. 편의점 앞, 긴토키

와버렸다…. 난 왜 여기 서 있는 것인가.
정말 사야하는 것인가. 남자와 하기 위한 콘돔을 진정 내 손으로 사야하는 것인가. 내 돈이 아니란 게 그나마 덜 억울해서 다행이다.

편의점 유리문이 이렇게 천근만근으로 느껴질 줄은 몰랐다. 무게가 느껴지기는 커녕 손잡이를 잡지도 않았는데 중압감이 느껴진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같다. 팔다리 한쪽쯤은 떼어줘야 들어갈 수 있는 문 같다.

내가 왜 이런 곳에 들어가야 하는 거지. 그 마요라 자식이 비겁하게 돈가지고 선수만 치지 않았어도 이렇게 될 일은 없었을텐데. 이런 걸 사는데 내 돈을 쓰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게 패인이었다. 나는 정말 바보! 가난뱅이 근성이 여기서 발휘될 필요는 없었잖아! 차라리 내 돈 쓰고 골목에서 기다리는 게 맘이 편했겠다! 이게 왠 벌거벗은 채 총대를 매고 전쟁터에 들어가는 꼴이야! 이 비유가 적절한 비유가 아니라고 해도 고칠 기력조차 없어! 주저앉고싶다!

아니지, 아니지. 잠깐 생각해보자고. 지금 내 손에 쥐어져있는 이건 내 돈이 아니고, 또 마요라는 이 편의점이 보이지 않는 그 골목에 있다. 즉, 난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은채 그 날 수입을 손에 쥐고있는 편의점 알바생과 같은 상태다.

이건 천혜의 기회잖아! 마요라 바보자식! 공돈을 내 손에 쥐어주다니! 이건 내 승리다!!

-아아니. 잠깐만….


15. 골목, 히지카타

나는 바보인가? 왜 그 놈한테 돈을 쥐어줬지, 그냥 내가 갈걸! 그럼 아까운 돈 날릴 필요 없이 둔영에 돌아갈 수 있었던 거잖아! 해결사 자식, 그 돈으로 역한 딸기우유나 쪽쪽 빨아대며 도망가고 있을게 틀림없다. 공짜로 얻어먹었다고 재수없게 실실 웃고 있을게 눈에 선하다. 바보다. 난 바보다. 어이없을 정도로 바보천치다.

아냐아냐. 잠깐. 기다려보라고. 도망가고 있을 거란 건, 내가 바라는 대로 되는 거란 거잖아. 이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아무 일도 없이 넘길 수 있게 된다는 거잖아. 기뻐할 일이잖아. 기뻐하자고! 그거에 비하면 그깟 몇푼 크게 아까워할 것도 아니지. 그놈한테 그 돈을 공으로 넘겼다는 건 생각할 수록 짜증나지만 그 정도 희생 쯤이야 참을 수 있다.

거기다 그렇잖아. 돈을 갖고 그대로 도망가는 게 아무리 지금의 최선이라고는 하지만 도망간다는 건 즉 등을 보인다는 거다. 다시말해 튄다, 라는 거라고. 지금 상황이 아무리 난감하고 속떨린다고 해도 그런 건 체면이 안산다. 튄다니. 내가 그럴 순 없다. 그 백발자식이 튀면 또 몰라도 쪽팔리게 내가 튈 수는 없지.

잘 선택했다! 대단히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 몇푼으로 체면을 지킬 수 있다니 정말 남는 장사다. 사무라이 체면이 몇푼 밖에 되지 않는 건가 하는 문제는 기쁜 마음으로 덮어둘 수 있다!


16. 편의점 앞, 긴토키

그래. 지금 내가 이 돈을 들고 집으로 가버린다는 건, 도망치는 거라고 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내가 여기서 그 골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다음에 그자식을 마주쳤을때 비웃음 당하겠지? 지금 이 발언은 그자식하고 다음에 마주치게 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게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고. 만의 하나로 우연히 만나게 된 그 시정잡배 경찰 놈이 날 내려다보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미래에 생길 수 있는 오만가지 가능성 중에 하나를 미리 고려해보는 거 뿐이니까.

하지만 돌아가지 않으면 영락없이 하게 된다. 그럴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어쩌지? 내가 여기서 한수 접어줘야 하는 걸까? 어른스러움을 발휘해서 내가 여기서 한수 접어줘야 옳은 선택이겠냐고. 30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왔는데 이런 일에 대한 해답 하나 찾지 못하다니 나 인생 헛 산 건가? 젠장 고작 이런 일에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해 회의를 품어야 하다니!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놈한테 돈을 건네받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 돈 손해보더라도 차라리 그 골목에서 편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싶다!

생각해보면 그자식, 왜 나에게 콘돔을 사오길 강요했던 거지? 돈을 주면 내가 그 돈을 들고 튈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거 아냐? 무서운 놈이군, 인정한다. 내 승리라고 했던 건 속단이었다. 괜히 그 시꺼먼 집단의 부장 노릇을 하고있는 게 아니었다. 나보다는 약한 놈이지만.

내가 지지않고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그런 방법 없을까. 지고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그대로 하게 되는 일은 피하고 싶다. 지고싶지는 않다. 하고싶지도 않다.

그렇다면 남은 건 상대방이 져주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

즉, 편의점에 나온 내가 아닌 골목에 있는 마요라가 신센구미로 돌아가면 되는 거다.


17. 골목, 히지카타

그 자식이 제대로 의미를 잡아 줬을까? 그 돈 가지고 뭘해도 좋으니까 제발 도망가달라는 의미를 눈치채줬을까. 혹시 중간에 '돌아간다=도망간다'라는 걸 깨달아버렸다고 해도, 부탁이니까 도망가줬으면 한다. 어른스러움을 발휘해달라고, 절대 놀리지 않을게. 네가 도망만 가준다면 이번 일에 한해선 네가 나보다 더 어른스러웠다고 인정할테니까.

하지만 만약 돌아와버린다면? 그렇게되면 더 생각나는 수가 없는데. 지금으로선 이게 내 최선의 생각이라고. 부탁이다, 돌아오지 마라. 돌아오지 마. 체면을 지킬 필요 없어. 네가 돌아와버리면 더는 방도가 없다고. 지금 우린 벼랑 끝을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란 말이야.

잠깐. 그럼. 내가 돌아가버리면? 내가 돌아가버리면 그 놈이 돌아오든 말든 이렇게 떨 필요가 없잖아. 좋은 선택이잖아. 곱게 이불 속으로 들어갈 수 있잖아. 이렇게 벌벌 떨면서 그 놈이 오느냐 오지 않느냐 조마조마 초조해 할 필요가 없잖아.

-아냐. 그자식이 돌아왔는데 내가 자리에 없다는 건, 그건 곧 그 놈을 편의점에 보내놓고 그 사이에 내가 도망쳐버린 게 된다. 그렇게 될 바에야 내가 편의점에 가는 게 더 나았다. 지금 내가 돌아가버리면 돈도 손해보고 체면도 못차리게 되는 거다. 그건 싫다. 제길 왜 그때 돈을 건네가지고.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놈한테 돈을 주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깟 몇푼짜리 체면 좀 깎인다고 무사의 영혼이 꺾이는 건 아니잖아. 차라리 편의점 앞에 서서 편한 고민을 하고 싶다.

내가 지지 않고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해결사 놈이 곱게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18. 편의점 카운터, 하세가와

난 며칠 전부터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있다.

여전히 잡히는 직장은 없고, 구할 수 있었던 거라곤 이 편의점 아르바이트 뿐이었다. 이 나이에 계속 아르바이트로 연명을 해야하나,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져서 관둘까 싶었지만 역시 하기로 했다. 체면도 구기고 현실과 타협해야하는 방법을 익혀야할 나이인 거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꿋꿋하게 카운터에 서있다. 원래 이 시간이면 취객 한두명이 들어올 법도 한데 오늘따라 아무도 없다. 조용하다. 아까부터 문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한량이 한명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한량이 누군가 했더니 긴토키 씨였다. 그는 오분 정도를 그곳에서 가만히 서있다가 이내 곧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반가워서 인사를 하려했는데 이쪽을 전혀 눈치 못챈 낌새다. 잘 보니 평소의 전혀 의지없는 얼굴이 대단히 어두워져 있었다. 무엇인가 대단한 고민이 있는 것인가? 하긴 그는 하릴없는 마다오처럼 보여도 안쪽엔 무언가 대단한 걸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남자다. 심각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 해도 어색할 것은 없다.

그는 생활용품이 있는 곳을 기웃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드디어 나를 봤다 싶었는데 이번에도 나라는 건 눈치를 못챈 건지 곧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하는 짓만 보면 콘돔을 사러온 초짜 남중생같은데 긴토키 씨가 그럴 리가 없지. 인기 없다 인기 없다 말은 그렇게 해도 잘 보면 주변에 여자가 많은 남자니까.

이번엔 그는 생활용품 진열장을 나와 잡지가 있는 코너를 어슬렁 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점프 발매일도 아닌데 뭔가 볼 일이 있는 건가. 그는 취미 없을 것 같은 퍼즐책을 들고 넘겨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아래쪽을 보고있는 듯 했다. 그 곳엔 어떤 잡지가 하나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성인용 잡지다. 고개를 숙여 그 표지를 죽 보는 듯 하더니 갑자기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왠지 눈을 마주치면 안될 것 같아서 카운터 주변을 정리하는 척 딴청을 피웠다. 그는 내가 보고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이번엔 손을 내려 그 잡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뚫어지게 쳐다본다. 내 기억에, 그 잡지의 이번 메인은 애널섹스였던 것 같은데. 아니, 거기에 관심있는 건 아니니까. 진열대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표지를 보고 기억하고 있는 것뿐이다. 정말로.

그나저나 긴토키 씨 아까부터 그 표지를 계속 보고있는 게 혹시 그거에 관심이 있는 건가. 랩핑된 잡지라 안을 보여줄 수 없다는게 안타까울 정도로 보고있다. 하지만 표정은 도색잡지표지를 보고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심각하다. 아, 혹시? 그런 내용을 보고있는 게 아니고 다른 뭔가를 보고있는 건가? 가끔 그런 것관 상관없이 흥미로운 주제를 실을때도 있긴 하니까.

그는 잡지를 다시 진열대에 꽂아두고 이번엔 스낵코너에 들어갔다. 과자를 사기 위해 들어온 표정은 아니었는데. 과연 그는 그 코너를 지나쳐 이번엔 아이스크림 냉동고 앞에 섰다.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들었다. 하지만 설마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위해 들어왔던 건 아니었겠지? 그런 표정이 아니었잖아, 긴토키 씨.

그러나 그는 그대로 카운터로 걸어왔다. 손에 든건 진짜 아이스크림 뿐이었다. 어라, 정말? 농담이지, 긴토키 씨?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이 편의점에 들어왔던 거야? 물론 편의점에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들어왔다는 게 이상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잖아? 뭔가를 고민하며 발걸음을 옮기다가 큰 목적 없이 편의점에 들어왔다는 포스였다고.

하지만 이런 내 의문도 아랑곳 않고 그는 카운터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려놓고야말았다. 긴토키 씨. 여긴 왜 온 거야. 진짜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위해 온 거야? 그렇게 계속 고개를 숙이고만 있지 말고 내 얼굴 좀 봐줘. 그리고 대답 좀 해줘.


19. 편의점 카운터 앞, 대화

"350엔입니다."
"어라, 하세가와 씨?"
"하하하하. 이제야 알아봐줬군. 언제쯤 눈치채나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고."
"………계속 보고있었다고? 계속? 처음 들어왔을때부터 계속?"
"아아. 얼굴이 너무 심각해보여서, 뭔가 고민이 있나 했지. 괜한 참견이 아닌가 싶지만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
"아냐. 아냐. 없어. 없다고. 그냥 잠이 안와서 밤 산책을 나왔다가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싶어졌던 것 뿐이야. 이건 진짜야."
"그래? 그럼 됐지만서도…."


20, 하세가와

아무 일도 없다고 말은 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개운하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빠징코에서 같이 여러번 털린 사이인데, 약간은 섭섭하다. 내가 크게 도와줄 수 없는 일일지는 몰라도 이야기를 듣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는데.

그대로 나가나 싶었는데 그는 아이스크림 포장을 뜯어서 입에 넣고 다시 편의점 안을 어슬렁 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뭔가 고민을 안고있다. 그는 지금 평범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 흡연자가 고민할때 담배를 입에 물 듯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는 것이다. 맛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넋나간 표정으로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 그 증거다. 물고있는 아이스크림조차도 대단히 느리게 먹고있다. 거의 먹고있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 걱정거리에 몰두하느라 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들지 않는 거겠지. 그 어두운 눈에 갈등이 스치는 게 보인다. 기력은 없어보여도 흔들리지는 않았던 그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듯 느껴진다. 주변으로부터 한심하다는 평을 들어가면서도 자신 안의 대쪽같은 심을 지켜왔던 사무라이를 이렇게 고민하게 만드는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21. 긴토키

부탁이다. 게맛살을 한줄한줄 뜯어먹듯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시간을 끌어줄테니까 제발 그 사이에 돌아가주라. 체면이 있지 내가 도망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22. 하세가와

혹시 그의 아이스크림에 또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저 아이스크림은 고민할때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용도로 입에 무는 것일 뿐만이 아니고, 그와 동시에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마지막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인 것은 아닐까.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이 한 개피를 다 피울 동안 각오를 굳히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그럴때 하는 고민은 보통, 회피하고 싶은데 결국은 해야만 하는 그런 일에 대한 것이다. 나도 그런 고민이 있었을때 담배를 피우며 그렇게 마음을 다졌던 적이 있어서 안다. 긴토키 씨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으로 그 역할을 대신한 건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담배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담배를 피웠을 것이다.


23. 골목, 히지카타

담배 다 떨어졌다….

진짜 자리 뜨고싶다. 담배를 사온다는 핑계로라도 자리 떠버리고 싶다. 정말 그래버릴까? 일단 여기선 몸을 숨기고, 안보이는 곳에서 기다려보는 거지. 그렇게 해서 그자식이 돌아오지 않으면 다행인 거고, 만약 돌아온다손 치더라도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담배를 사러 가기 위해서였다고 하면 되는 거야. 갔다 와서 계속 기다려봤지만 네 놈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이야. 기가 막힌 게획이다. 내가 없는 걸 확인하고 나면 좋아라 돌아갈 게 틀림없으니까.

아니지. 꼭 그렇다고 단정지을 수만은 없지. 그자식이 기다리지 않는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잖아. 만약 그자식이 정말 기다려버린다면 난 꼼짝없이 나서야한다. 그렇게 되면 담배를 사러 다녀왔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어진다. 증거로 내밀 새 담배갑이 없으니까.

크악…. 머리 아프다. 괜찮은 계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막혀버렸다. 진심으로 담배 한대 피우고 싶다. 왜 하필 이럴때 동이 나고 난리인 거냐고. 돌아돌때 내 담배 한갑만 사와주라, 해결사. 아니, 잘못 말했다. 돌아오지 마라. 부탁이다, 돌아오지 마라.

힘내라! 넌 돌아갈 수 있는 놈이야!


24. 편의점 카운터, 하세가와

그는 결국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말았다. 중간부터 아이스크림이 녹기 시작해서 더 버틸 수가 없어졌던 듯 하다.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허겁지겁 처리하던 그의 얼굴이 그렇게 슬퍼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끝나버린 시간이 아쉬운 듯 먹고 남은 막대를 잘근잘근 씹다가 쓰레기통에 버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한 거냐 사무라이. 사무라이가 약해지는 모습은 왜 이다지도 보기 힘든 걸까. 아저씨한테 털어놔봐.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진심이 통한 것인가, 편의점 밖으로 나갈 것처럼 보였던 그가 멈춰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뭐든 상담해봐라. 내가 아무리 마다오라고는 해도 살아온 세월이 있다. 그리고 너라고 하는 사무라이를 알고있다. 네가 뭐든 겁내지 않고 피하지 않는 사무라이로 남을 수 있도록 내가 밀어주마.


25, 편의점 카운터 앞, 대화

"~하세가와 씨. 아깐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내가 고민이 좀 있거든."
"그럴 거 같았어. 표정이 좋지 않더라고. 들어주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으니 뭐든 털어놔봐."
"그게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지. 아 제길…."


26. 하세가와

무엇을 망설이나 전사여! 지구 생명체의 모든 힘을 너에게 모아주겠다, 어서 말해봐!


27. 대화

"어떤…영 내키지 않는 일이 있는데 말이야. 내키지 않는 수준을 넘어서 적극 사양하고싶은 일이 있는데 말이야."
"무슨 일인데?"
"뭐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좀 그렇고…. 그냥 그런 일이라고만 생각해줘."
"말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냥 심정이라도 털어놔봐."
"그게…. 내가 지금 어딘가로 돌아가야해.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말이야. 사실 난 그렇게 하고싶은 일은 아닌데 어쩌다보나 그걸 해야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렸어. 피하면 질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되어버렸다고. 난 솔직한 심정으로 정말 진짜 무진장 대단히 매우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피해버렸다간 누군가에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피하고는 싶어."
"……."
"하세가와 씨. 내가 지금 남자의 자존심을 지켜야하는 걸까, 본심에 따라야하는 걸까. 내가 꼭, 돌아가야만 하는 걸까?"
"긴토키 씨."
"어어어어어어어?"


28. 긴토키

내 이름을 부른 하세가와 씨 목소리가 왠지 무지하게 무겁게 들리는데. 내 어깨에 턱 올려놓은 하세가와 씨 손이 무지하게 진중하게 느껴지는데. 하세가와 씨 분위기가 지금 무척 부담스럽게 느껴지는데.


29.. 대화

"남자는, 도망치면 안되는 때가 있어. 특히 사무라이는 말이지."
"……."
"아무리 피하고 싶은 일과 맞닥뜨리게 되었다고 해도 절대 도망치면 안되는 일이 있는 거야."
"…하세가와 씨."
"긴토키 씨. 넌 할 수 있는 놈이야. 긴토키 씨가 아무리 나랑 같은 마다오 취급을 받고있다고 해도 사실은 그렇지 않은 놈인 걸 난 알고 있다고. 꺾이지 않는, 그런 대쪽같은 사무라이지."
"……."
"아저씨는 부러워. 현실 앞에 굴복해서 살고있는 이 아저씨는 말이야. 현실은 커녕 마누라와 마주하는 것조차도 무서워서 도망치고 있는 이 능력없는 약한 아저씨는 그런 대쪽같은 네가 대단히 부러워. 그래, 너는 사무라이야.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서 큰 힘을 발휘해내는 사무라이지. 너에겐 힘이 있어. 무슨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너에겐 그걸 헤쳐나갈 힘이 있어. 아저씨가 응원할게. 도망치지 마! 돌아가! 남자답게! 사무라이답게!"


30. 하세가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 말을 듣더니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이 가게에 들어갔을 때 맨 처음 기웃거렸던 생활용품 진열장으로 가서,

콘돔을 꺼내와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긴토키 씨. 잠깐. 이게 각오의 결과물이야…?


31. 편의점 앞, 긴토키

편의점 나와버렸다…. 발걸음이 무겁다.

더 늦으면 진짜 도망갔다는 의심을 받을 수가 있다. 이 이상 뭉기적거릴 수가 없다.

마요라 놈이 돌아가있길 바란다. 제발.
최대한 느리게 돌아가 줄테니까, 아직 기다리는 중이라면 지금이라도 자리를 비워라.


32. 골목, 히지카타

저자식 돌아와버렸어어어 ´; 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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