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을 받고 일약 스타가 되기 전의 사카타는 고스트 라이터나 자유기고가로 근근이 먹고 살았다. 일거리가 전혀 없을 때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공모전 준비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동거인이 그에게 돈을 닦달하지 않아준 덕분으로, 이제 갓 형사과에 들어간 바로 그 동거인 히지카타의 주머니 사정이 풍족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돈이 들어와 주는 만큼 사카타보다야 사정이 나았다. 반씩 내기로 한 집세를 밀릴 때마다 사카타는 역시 아르바이트를 할까, 하고 그에게 물었는데 그는 그럴 때마다 잠깐 미간을 구기다 '성공하면 갚아.'라며 무뚝뚝하게 이야기를 끝낼 뿐이었다. 그렇게 말하기 전에 꼭 한 번씩 인상을 쓰는 이유를 사카타는 못내 묻고 싶었지만 당장 없는 돈 때문에 그 앞에서 따지지는 못하고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을 목구멍 아래로 꾹꾹 눌러 내리곤 했다. '섣불리 생각하면 안 돼.' 매번 사카타가 속으로만 거듭하는 주문이었다. '저 자식은 항상 앞뒤 다 잘라먹고 얘기하니까 섣불리 생각하면 안 돼.'.

대등하지 못한 경제 관계에도 그들이 같이 살고 있는 것은 사카타와 히지카타가 단순한 룸메이트 관계가 아닌 까닭이었다. 초등학교 때 한번 같은 반이 되었다가 고등학교 때 뜻밖의 재회를 한 후 사카타는 히지카타에게 고백을 했다. 사카타는 중학 시절에 이미 자신의 성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말보다 주먹이 더 빠르다는 소문의 히지카타였기에 사카타는 크게 한방 얻어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돌아온 것은 알았다는 한마디 말 뿐. 그 '알았다.'는 말이 '사귀어도 오케이.'란 뜻이었다는 걸 사카타가 알게 된 것은 고백으로부터 한 달 뒤 불려간 학교 건물 뒤에서 다짜고짜 날아온 히지카타의 주먹 덕분이었다.

"너 이 새끼 사귀자고 해놓고 안면몰수냐?"
"우리 사귀고 있었어?"

그 뒤 사카타는 한참을 얻어맞았고 그제서야 히지카타가 했던 알았다는 말이 사귀자는 의미의 대답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에조차 히지카타가 했던 욕은 너무나도 함축미가 넘치는 욕이었다. '아오, 이 씨발 페도로!'. 사정없이 움직이던 히지카타의 주먹을 어떻게 감싸 잡고 너무나도 아파 쉴 새 없이 넘쳐흐르던 눈물로 오해를 호소하고서, 그러고도 수십 분간 정말이지 아니라고 아니라고 사정을 설명하고서야 히지카타는 눈썹꼬리를 내려주었다. 그가 검은 머리칼 사이 살포시 드러난 새하얀 귓바퀴를 발갛게 물들이며 어쩌지? 하고 묻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당황하는 얼굴이 사카타의 눈에 기가 막힐 만큼 예뻐 보이지 않았더라면. 그의 첫사랑은 퉁퉁 부은 얼굴로 아프게 끝맺음 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그가 했던 욕의 의미는 '때마침 개봉했던 이웃집 페도로를 너랑 같이 봐야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가 자꾸 나를 피해서 고민하는 사이 페도로가 내려버렸다. 이 씨이발 새끼야.'라는 의미였다고 추정된다. 반투명한 빨간 빨대로 컵 밑바닥에 남은 콜라를 쪽 빨아올리고 다시 앞뒤 다 잘라먹은 말로 분통 터져하는 히지카타의 손을 마주 잡고. 사카타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우리, 앞으로 대화를 많이 하자. 많이.

그렇기에 사카타는 언제 어느 때고 '섣불리 생각하면 안 돼.'를 되뇌었다. 어떤 오해가 그들 사이에서 터져 나와도 차분히 대화를 해보면 히지카타가 사카타를 생각하고 있음은 확실한 듯 했다. 자신의 무얼 좋아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항상 남았지만 그런데도 차분한 대화의 끝에 직설적으로 나오고 마는 나 좋아하느냐는 사카타의 질문에 히지카타는 언제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사카타가 원랜 그렇게 아니꼬운 질문을 대놓고 물을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어쨌든 그의 근원 모를 확답은 가끔가다 솟구치는 사카타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좋은 약이었다. 하도 자주 나를 좋아하느냐고 묻다보니 왜 나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은 차마 할 수 없을 지경으로. 그런데도 그의 끄덕임 몇 번으로 모든 것이 좋았다. 자신이 반백수가 되기 전까지는.

사카타는 오늘 오전 자기 앞으로 배달되어 온 온라인 서점 택배 박스를 꺼질듯이 내려다봤다. 자신감이 꺾이는 순간이 바로 이런 때이다. 반담하고 있는 집세조차 가끔씩 못내는 반백수가, 인터넷 서점에는 다달이 돈을 꼴아박고 있다는 증거가 가슴 앞에 들이대지는 바로 그런 순간. 상자에 담긴 게 책은 아니었다. 두 달 전 그에게 일감이 살짝 여유 있게 들어왔던 때, 그때 응모했던 온라인 서점의 이벤트 경품이었다. 지금 그가 쓰고 있는 흰색의 텀블러와 한 쌍인 흑색의 스텐 텀블러. 그게 눈앞의 상자에 담겨있었다.

사은품 리스트에 흑백 한 쌍으로 올라온 텀블러를 봤을 땐 이게 그렇게 세트로 갖고 싶었는데…. 흰색은 나, 검은색은 히지카타. 딱 그렇게 보여서는.

얼마 이상 구매를 해야 사은품 하나를 고를 수 있었기에 처음엔 고민을 했다. 검은색이 히지카타 손에 들려있으면 그렇게 그림이 될 것 같은데. 하지만 형사가 텀블러 쓸 일이 있긴 하던가. 마침 내가 텀블러 하나 갖고 싶었기는 한데. 노트북 두들기면서 이걸로 커피 마시면 편하겠네. 다시 봐도 되게 괜찮네. 헤헤.

그때 사이트를 계속 둘러보면서 사카타는 구매 사은품 외에 이벤트 경품으로도 그 흑백 텀블러가 걸려있는 것을 발견했고, 이전부터 구매액 천 엔당 하나씩 받았던 요상한 이름의 티켓들을 경품 추첨표로 넣을 수도 있다는 걸 발견했고, 사이트 곳곳에 걸려있는 설문조사나 퀴즈에 참여하면 추첨표를 왕창 더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원래 사카타가 갖고 있던 티켓들이나 이번에 책을 사면 새로 받게 될 티켓들이나 갖가지 퀴즈에 참여하면 받을 수 있는 추첨표나 합해 헤아려보니… 어림잡아도 50장은 넘었다. 이거 괜찮지 않을까. 당첨, 신이 코를 파다 깊이 찌른 고통에 한눈 좀 팔아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그래서 사카타는 망설임 없이 보고 싶던 책들을 주문했다. 일단 당장 가지고 싶었던 흰색 텀블러를 얻기 위해 이전부터 갈등하며 사지 않았던 책들을 이것도 저것도 얹어서 주문했다. 이번 달엔 돈 좀 들어왔잖아. 이거 원래 볼까말까 고민했던 책들이고. 받아보고 별로면 중고로 팔면 되지. 조금이라도 회수는 되는 거잖아. 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흰색 텀블러가 그의 손에 들어왔고 나머지는 운이었다. 5n 장이나 되는 추첨표가 있는데 뭐. 나 여기 제일 높은 등급 회원인데 혹시 알아? 책 많이 산 순서대로 잘라줄지도. 그는 깜박이는 알림창에 새로 올라온 추첨표를 몽땅 경품 리스트의 검은색 텀블러에 쏟아 부었다.

후회가 된 것은 그렇게 받은 흰색 텀블러로 몇 번 커피며 녹차며 담아 마시다 씻기가 귀찮아 개수대에 박아두고는 그 텀블러와 같이 받았던 책을 쥐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날도 여전히 잠복근무로 돌아오지 않는 히지카타 때문에 쓸쓸히 이불 위에 누워 천장의 얼룩을 세고 있을 때였다.

이 책 비싸기만 하고 오질 나게 재미없다. 괜히 샀네.
이거 책값이면 저번에 못 냈던 집세, 그거의 몇 분의 몇이냐.

아…. 그러네.

천 엔당 하나씩 줬던 그 쿠폰들. 환산하면 얼마인 거지.

-그렇게 받은 텀블러 지금 씻지도 않고 며칠 버려뒀더라.

온갖 지렁이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멀스멀 타고 올라와 그는 입술을 앙다물고 천장의 얼룩만 계속 헤아렸다. 곰팡이 같은 얼룩보다 그 얼룩이 져 있는 오래된 천장보다 며칠 째 갈아입지 않은 잠옷보다 이불 위에 누워 숨만 쉬는 자신이 더 이 집구석에 쓸모없는 존재 같았다.

히지카타는 그 이튿날 저녁에 돌아왔다. 돌아온 신참 형사는 연일 이어지는 일이 고된지 며칠 새 턱 선이 더 날카로워지고 눈빛도 더 흉흉해져있었다. 그런데도 손에 꼬박 들고 온 요 앞 마트 봉투 안의 딸기우유와 간식거리의 흔들림이 간지러워서 사카타는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발가락만 꼼지락댔다. 히지카타 얼굴에 나있는 수염과 자신의 얼굴에 나 있는 수염이 그렇게 딴판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난 이거 시간이 없어서 못 깎은 게 아닌데, 헤헤. 죽어라 요놈. 죽어라 요놈아. 히지카타는 비틀거리며 옷도 벗는 둥 마는 둥으로 펴놓은 채였던 이불 위에 몸을 쏟았다. 내 퀴퀴한 땀내가 나겠지, 헤헤. 사카타는 울적한 기분으로 자기 손에 뜻대로 되는 히지카타의 발에서 양말을 벗겨냈다. 며칠 못 갈아 신은 듯한 양말보다 지저분할 자신의 체취에 감싸인 히지카타. 사카타는 엎드려 누운 히지카타의 목 뒷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시큼한 냄새가 섞인 묵직한 담배 향이 물씬했다. 며칠 만에 느낀 그 불쾌한 냄새에 사카타는 배꼽 아래 아래가 쿡쿡 쑤시는 듯 했다, 헤헤헤. 죽어라 요놈. 죽어라 요놈.

그때의 내음이 다시 사카타의 코털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그는 콧김을 한번 세차게 내뱉었다, 킁. 오늘은 그로부터 두 달 뒤 집세를 내는 날이었다. 어떻게든 있는 돈을 다 끌어 모았지만 딱 그때의 재미없었던 책값 정도의 돈이 비어버렸다. 상자에서 꺼내본 텀블러는 검고도 검은 게 참으로 폼이 나서 히지카타의 마르고 큰 손에 꼭 한번은 쥐어주고 싶었다. 그 녀석은 쓸 일도 없겠지마는. 킁킁.

이윽고 참회의 시간이 왔다. 아침 내 죽은 듯 자고 있던 히지카타가 일어나 바로 달력을 보고 아, 집세, 말하곤 반쯤 뜬 눈으로 사카타를 쳐다보았다. 사카타는 그 앞에 정좌를 하고 앉아있었다. 멍하니 그를 보던 히지카타가 거푸거푸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다 말없이 이불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 어디 가는데."
"응? 집세."
"나 조금 모자라지만 그래도 집세 쫌 낼 수 있는데."
"어? 아, 괜찮아."
"괜찮다니 뭐가."

히지카타는 힘 풀린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갸웃했다.

"모자라도 돼."
"반씩 내기로 했었잖아?"
"아는데. 너 성공하면."
"내가 성공할 것 같아? 알잖아, 나 빠칭코 자주 가고. 글 쓴답시고 자꾸 끝까지 읽지도 않는 책이나 사대고."
"응, 아는데."
"아는데 괜찮아?"

자꾸 말이 빨라지고, 어조가 높아지고. 아무 잘못 없이 성실한 그가 잘못됐다고 힐책하는 것 같고. 사카타는 그런데도 자꾸만 뱉어내야만 했다. 치졸하고도 유치한 노란 싹들이 계속계속 혀끝에 돋아나서.

"너 왜 괜찮다고만 해."
"그니까 성공하면."
"내가 언제 성공할 거 같은데. 나는…, 기약도 없잖아. 난 그냥 반백수잖아. 그냥… 안 되는 거 붙잡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안 되는 놈이 너한테 빌붙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보탬도 안 되는 새끼가 돈 생기면 사탕이나 쭉쭉 빨고 책이나 쌓아두고. 허구한 날 인터넷이나 깔짝거리고 잠이나 처자고. 야, 넌 이게 괜찮니."
"허."

히지카타의 그 한 음절에 사카타는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사카타는 더, 더, 폭로하고 싶었다.

"저기 흰색 텀블러 뭐냐고 전에 물어봤지? 내가 몇 천 엔짜리 꼭 필요도 없던 책들 지르고 얻었다. 그 몇 천 엔이면 지금 내가 모자란 집세 내고도 남는다고. 그렇게 지른 책 존나 재미없었다고. 씨발 이거 아냐? 그런 책들이 씨이발 지금 니 등 뒤의 상자에 몇 십 권 쌓여있다. 내가 못 낸 집세 몇 번을 내고도 남았을 종이 짝들. 중고로 판다 해놓고는 씨발 결국 택배비 아깝다고 교통비 아깝다고 가져다 판 게 없어. 존나 씨발 그것도 못하는 게으른 새끼가…. 글을 쓴다고."
"야, 사카타."
"그런 새끼가 쓰는 글에… 씨발 뭐가 있겠냐. 안 괜찮은데…. 왜 괜찮다고 해."
"야."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인상을 쓰면서 그러지 말라고…."
"야 내가 뭘."
"알바하지 말라고…."
"내가 언제?"

사카타는 푸드덕 펄쩍 뛰었다. 겨드랑이에 깃털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너, 인마, 내가 집세 못 낼 때마다 항상 여기에 이렇게 주름 꾹꾹 이렇게 눌러가면서 성공하면 갚으라고 인마. 알바 할까 물어볼 때마다 인마."
"하지 말라고는 안했지?"
"인마!"

사카타는 처지도 잊고 잠깐 열불이 터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저 녀석 다 잊은 거야? 내가 죄인처럼 알바 할까 물어볼 때마다 항상 거만 떠는 얼굴로 성공하면 갚으라고, 갚으라고. 아…. 그래, 하지 말라고 직접 말은 안했구나.

"야, 그래도! 문맥상 하지 말란 의미로 들리잖아 그거!"
"문맥?"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치는 히지카타를 두고 사카타는 한 번 더 깨달았다. 아…. 그렇지. 이 녀석하고 문맥에 대해 논하려 하다니. 말에 행간이 너무 있거나 없거나 하는 이 녀석하고.

"너새끼 표정이 지금 열나게 밉살맞은데 한대 쳐도 돼?"
"강력계 형사님아, 소설가 지망생한테 함부로 손찌검 하지마세요. 잘못하면 골로 간다."
"어쭈, 새끼야. 니가 골로 가면 인마. 내가 손찌검 하면 인마."
"사람 살려 조폭 잡는 형사 놈이 연약한 문학도 얼굴에 주먹 꽂는다! 두 대 꽂는다!"
"옆에 들릴라, 좀 닥쳐봐. 너 나 직장 잃으면 살 수 있냐?"
"이건 뭔가 좀 잘못 됐어. 매 맞는 남편 포지션 이거 아주 잘못 됐어."
"아 좀."

크크크, 히지카타는 별안간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왜 웃어."
"있어봐…, 크크크."

여전히 눈곱이 낀 채 히지카타는 계속 크크크 낮게 웃다가 눈을 깜박이곤 손으로 비볐다. 사카타는 얼른 마저 떨어지지 않은 눈곱을 떼내주었다.

"이상해, 보통 이거 네 역할인데."
"뭐."
"입으로 설명하고…, 대화하려 하는 거. 항상 네가 했는데. 그렇잖아."
"그런 너는 갑자기 말을 길게 하잖아."
"형사일 하려면 그 어떤 못난 놈도 말을 알아 처먹게끔 해야 한다는 걸 배웠거든. 그게 설득이든 협박이든. 그래서 네 생각 많이 났는데."
"허."
"그니까 들어봐. 넌 좆구렸던 그간의 내 말도 이해하려 해왔잖아."

그 하얀 텀블러, 전에 물어봤을 때 네가 대답을 피해서. 맘에 걸려서 한번 찾아 봤었어. 내 기억에 그 텀블러에 서점 이름이 적혀 있었거든. 그치? 그걸로 검색했더니 나오더라고. 보고 생각했지. 이 자식 자기 거만 얻게 돼서 말을 피했구나. 그런 느낌이었어. 있어봐. 돈만 되면 넌 이걸 둘 다 갖고 싶어 했겠네, 근데 그 돈이 안 됐구나. 검은색만 보면 내가 떠올라서 지겨우니 옷 다른 색 좀 입으라고 시비 거는 네가, 그러면서도 꼭 흑백 한 쌍의 뭔가가 있으면 나에게 사진이라도 찍어 보여주는 네가 이… 검은색 텀블러를 보고. 그래 그런 생각을 안했을 리 없어. 넌 내 걸 얻질 못해서 말 꺼내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내가 이런 확신을 왜 하겠어?

나는 네가 겪었다시피 중간에 잡아주지 않으면 말이 하늘로 가버리는 놈이야. 그런 말조차도 별로 다듬고 하질 않아. 넌 그런 날 붙잡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대화를 해왔어. 내 짧은 말이 갑갑해서 막판엔 항상 홧김에 너 나 좋아는 하는 거지? 라고 내질러 버릴 정돈데도 진절머리 내지 않고 계속 나를 붙잡고, 계속. 내가 널 좋아한다는 확인을 포기하지 않았잖아. 거기에 내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면 넌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왜 그런 거야? 내가 널 좋아한다고 고갤 끄덕이면…. 욱하던 순간에조차도 안심하던 게. 그것만 확인하면 뭐에 화가 나도 괜찮다는 듯이. 그렇게 계속, 여태껏, 여전히 나와 같이 있잖아. 너 그게 얼마나…. 날 편하게 했는지 아냐.

난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를 때 인상을 쓰지만 그건 너도 이미 아는 버릇이었을 텐데. 그런데도 네가 불안한 순간에는 내가 인상을 쓰는지 신경을 쓰고 말던 건 말이지, 그렇게 내가 인상을 쓰는 게 싫었던 건. 혹시라도 내가 너 싫어져 버렸을까봐…. 아냐? 네가 생각하기에 싫어질 법한 네 모습을 내가 싫어해 버릴까봐…. 그렇지? 그게 아니었다면 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을 놈이잖아. 잘 알고 있다고. 일단 너, 나를 포함한 그 누가 뭐래도 소설 계속 쓰겠지. 그거야말로 나조차도 좋다 싫다 할 영역이 아니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하고 싶어 했던 그거. 그렇게 쓰고 싶어 하는 소설. 나도 조금이나마 편하게 쓰게 해주고 싶었어.

네가 항상 내가 고개 끄덕이는 걸 확인했듯이 나도 네 표정을 확인했어. 그리고 그냥 그걸로 모든 게 좋아지는 거야. 그게 뭔지 넌 알 거야.

긴토키.

텀블러 말인데…. 넌 잊고 있었나 본데 우리 적립금 때문에 그 서점 계정 공유하고 있잖아. 네가 이 검은색 텀블러에 표 몰빵 해놨다는 거 진작 알고 있었거든. 당첨이 됐다는 것도, 그게 이맘때 쯤 배송이 된다는 것도.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나한테 뻐기는 얼굴로 이 텀블러를 내미는 걸. 내가 냉장고 병맥주를 왜 사뒀다고 생각해? 여기 따라 마시기엔 좀 이상하긴 한데.

야 인마, 긴토키야.

아 그래, 좀 이 씨발놈아. 너 전에 집세 3개월 치 밀렸던 때부터 혼자서만 몰래 딸치는 거 다 알고 있다고. 니말대로 너 존나 게을러서 휴지통 잘 안 비우잖아, 내가 몰랐겠냐? 그러니까 날 두고 그런 엿 같은 짓 그만하고.

이만 와서 나한테 키스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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