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도시. 적당한 동네. 적당한 남학교. 그 남학교의 적당한 1-B반. 너와 나는 그 중에서도 참 적당한 사이였다.

왜인지 얼굴이 넓었던 나와 학년 사이에서 은근히 유명했던 너. 처음 너와 나 사이는 그저 네가 나를 별난 녀석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나 혼자 짐작하는 정도의 사이였다. 너와 나는 번호가 맞지 않아 같이 주번을 맡는 일도 없었고 취미가 맞지 않아 이야기 꽃을 피울 일도 없었다. 책상이 근처가 되는 일도 별로 없었다. 나는 짝수 번호였고 넌 홀수 번호라서 체육시간 축구를 할 때 한 조가 되는 일조차 없었다. 그때 우리 반은 번호 홀짝수로 편을 갈랐으니까. 넌 그 성격에 어울리게도 공격수를 할 때가 많았고, 난 내 적당한 성격에 어울리게 후보 선수를 가장하고 구경만 할 때가 잦았다.

언젠가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짝수 편에 사람이 부족했던 적이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그때 딱 한번 공을 찼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난 운동은 꽤 몸에 맞는 편이라 그날 운동장을 종횡무진으로 누볐다. 홀수 쪽엔 괜찮은 수비진이 없었고 난 진짜 다 쓸 만한 선수였고. 더군다나 난 너를 장외에서 쭉 지켜봤던 터였다. 처음엔 너의 움직임에 당황했지만 곧 네가 뭘 하려는 건지 머릿속에 쉽게 그려졌다. 그때 넌 내가 널 손쉽게 다룬다고 생각했을 거다. 내 타고난 헐렁한 표정 덕분에 특히 더 그랬을 거다. 넌 그날부터 나를 꽤나 신경 쓰기 시작했고, 난 그게 재미없어서 그 이상 선수로 뛰는 일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네가 몇 번이나 날 툭툭 건드리곤 했기 때문에 언젠가부터는 너와 내가 라이벌이라는 인식이 여기저기 심어져 있었다.

그때부터 서로의 존재가 마주치는 일이 드물지 않게 되었다. 주변에서 너와 날 비교하곤 했다. 열등감을 부추기는 비교가 아니고 비슷한 점을 맞춰보는 식의 비교를. 그 시작은 나와 적당히 점심을 같이 먹고 있던 녀석들로부터였다. 처음엔 무슨 은발마왕과 흑발용사 같은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너와 내가 서로 닮았다는 이야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조용히 흐르고 흘러 결국 너와 나를 같은 과로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넌 그 말들에 펄쩍 뛰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쯤에 난 너와 쭉 어울리고 있는 다른 반의 소꿉친구가 너를 토시라고 부른다는 걸 알았다.

난 그때까지 네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출석부를 뒤져서 네 이름이 히지카타 토시로라는 것을 알았다. 그 이름을 알기 위해 출석부를 뒤진다는 게 쑥스러워서 난생 처음 일등으로 등교해 반 열쇠와 출석부를 손에 쥐어야했다. 그렇게 알아낸 이름을 부르는 건 왠지 닭살스러워서 난 그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네가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것은 그 후다. 마찬가지로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는 나와 같은 시간대에 하교한다는 걸 눈치 채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꽤 자주 운동계 동아리 헬프로 들어가곤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건 꽤 생소한 사실이었다.

그즈음에 너와 나의 자리가 가까워졌다. 자리배정은 제비뽑기로 결정되기 때문에 그건 정말 순수하게 우연이었다. 내가 뽑았던 번호 26번을 창가 맨 뒤쪽 번호인 7번과 바꾸려면 무슨 말로 구슬려야할까 생각하던 차에 반장이 네 이름을 25번 자리에 적었다. 바로 앞자리. 내 이름은 26번 자리에 이미 적혀있었다. 나는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네가 자리를 바꾸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너도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자리를 바꾸지 않았던 이유가 있던 걸까. 혹시.

그날 밤 베개를 부여안고 생각했다. 수업 시간에 보는 네 뒷모습이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검은 머리에 살짝 가려진 귀나 목덜미에 자꾸 시선을 뺏겼다. 혹시 네가 뒤를 돌아봐서 눈을 마주쳐주지 않을까. 무엇인가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생각해보다, 너에겐 굳이 자리를 바꿔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난 자연스럽게 너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너와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는 것은 꽤 재밌었다. 대화는 늘상 만담식이었다. 내가 바보 같은 말을 하면 네가 딴죽을 건다. 내가 얼간이 짓을 하면 네가 넌더리 친다. 이러니저러니 하는 중에 어느새 사이가 꽤 가까워졌다. 복도에 있는 너를 보고 다가가서 말을 걸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 이미 같은 과로 분류되고 있던 너와 내가 아웅다웅하면서도 빠르게 친해지는 것을 주변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딱 주번이었던 너를 내가 변덕인 척 도와주는 것도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진 않게 되었다. 그게 뭐냐, 아트와도 같은 이 프로의 손놀림을 잘 봐라, 그런 농담조의 핑계를 대고 같이 칠판을 닦으면서. 네가 나와 키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운동을 좋아하는 것치고 네 피부가 까맣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턱이 매끄럽다는 것을 알았다.

왼쪽 턱 아래쯤에 면도를 하다 벤 것 같은 작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귓불이 얇다는 것을 알았다.

검은 머리카락치고 홍채 색이 엷다는 것을 알았다.

콧등 중간에 약간 뭉툭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콧날은 약간 둥글다는 것을 알았다.

인중이 뚜렷하다는 것을 알았다.

입술은 얇다는 것을 알았다.

입술이 너무 붉지는 않다는 것을 알았다.

볼에 잔 흉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양 볼을 내 손으로 감싸보고 싶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너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집에 돌아가서.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붙어 다니지는 않았지만 같이 앉아있으면 어색하지 않게 장난을 거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넌 여전히 나에게 경쟁심을 드러냈지만 태도는 전보다 호의적이었다. 그것은 기뻤다. 우리는 전보다 대화를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고릴라를 닮은 네 소꿉친구가 결석을 했던 어느 하루에는 같이 점심을 먹기도 했다. 네 식성이 특이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마요네즈를 당연하단 듯이 산처럼 뿌리고 있는 걸 봤을 때는 과연 약간 당겼다. 너도 단 것으로 도배된 내 점심 메뉴를 눈살 찌푸리며 봤으니까 그 점은 양해해줬을 거라고 생각한다. 점심을 다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여기저기 걸어 다니며 우리는 평소보다도 쓸모없고 자잘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제 봤던 쇼 프로에 대한 것이나 곧 다가올 방학에 대한 것. 동아리에 대한 것. 동아리는 하지 않느냐고 툭 던진 질문에 너는 약간 망설이더니. 곤도가 다른 학교의 시무라라는 여자애를 좇아 다니느라 바빠서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자신도 그냥 아무 동아리에도 들지 않았다고 대답해줬다. 곤도가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넌 어처구니 없어하며 내가 고릴라라고 부르는 자신의 그 소꿉친구라고 말해줬다. 곤도가 그 여자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봤더니. 넌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매일 매일 얻어맞고 돌아오면서도 헤헤거리는 게 정말 지겹다고 불평했다. 난 중학교 때 같은 학교였던 그 시무라의 주먹맛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대단한 놈이라고 평가해줬다.

나는 계속 물었다. 곤도랑 있는 게 그렇게 좋냐고.

넌 곤도가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답해줬다.

그 털이 숭숭 난 고릴라가 네 이상형이냐고 너 혹시 호모였냐고 너스레 떨었더니 넌 화를 내면서도 진지하게 다시 고쳐 말해주었다.

아량이 넓고 인품이 좋아서 어릴 때부터 부러워하던 인간상이다. 곤도는 좋은 녀석이라 남을 진득하게 믿어주고 성격이 올곧아 호감을 받는다. 자신은 의심이 많아서 그런 호인이 되기는 어려웠다. 지금은 그런 곤도와 내가 균형이 맞는걸 알아서 내 성격을 고칠 생각은 들지 않지만 옛날엔 곤도 같은 호인이 되기를 꿈꾸었다고.

그러냐. 고릴라가 좋은 놈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넌 아무래도 지금 콩깍지가 좀 씐 것 같다. 그런 말은 목구멍 안으로 꾹 삼켰다.

이번엔 네가 물어봤다. 넌 이상형이 있냐고.

난 네가 이상형이라고 답했다.

넌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다시 만났을 때 난 네 머리를 반갑다는 듯이 헤집어 놓았다. 너는 신경질을 부렸지만 그렇다고 아주 화를 냈던 것도 아니라 난 가끔씩 네가 틈을 보일 때마다 네 그 검은 머리를 헤집었다. 그 이후 스킨십이 자연스러워져서 레슬링 기술을 건다거나 하는 장난도 주고받게 되었다. 자리는 다시 멀어졌지만 쉬는 시간에 내가 네 자리로 찾아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졌다. 네 MP3에 흥미를 보이며 목록을 뒤지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메탈 일색인 네 리스트에 스팅 노래가 하나 있는 것을 보았다. 난 속으로 그 노래 제목을 외우면서 리스트에 뜬금없이 끼어있는 발랄한 마법소녀물 애니메이션 오프닝에 대해 놀려댔다. 넌 얼굴이 시뻘개져서 MP3를 낚아채갔다.

난 그 노래가 들어있는 스팅 씨디를 하나 샀다. 사카모토의 씨디 플레이어를 빌려서 가끔 들었다. 쓸쓸할 때 꽤 마음을 달래주었다.

이즈음 난 아는 3학년 선배가 가지고 있던 옥상열쇠를 손에 넣었다. 진학하지 않고 가업을 이으려던 선배였는데 그것 때문에 바빠져서 옥상을 더 쓰지 않을 것 같다, 그게 아깝다고 열쇠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난 같이 군것질을 하다가 그 일을 너에게 은근슬쩍 흘렸다. 네가 그걸 듣고. 지대한 관심이 생겼다는 걸 눈치 챘다. 내 주머니를 흘끔흘끔 보는 너의 눈. 주머니 속의 열쇠를 살짝 쥐어들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난 네 손에서 약하게 담배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옥상에 같이 가는 대신 남들에겐 알리지 말라는 조건을 붙였다. 넌 곤도는 안 되느냐고 물었다. 난 거북한 표정으로 깊이 생각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넌 곧 쓴웃음 지으며 알겠다고 말했다. 기뻤다. 점심 먹고 나서 곤도한테는 적당히 핑계를 대고 옥상에 올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넓은 옥상. 아무도 없고. 탁 트인 하늘. 가을인데도 점심때라 따스한 햇살. 마치 봄볕같이. 그 따스함에 긴장이 풀어져 온 몸이 늘어졌지만 마음은….

넌 정말 혼자 올라와주었다. 단 둘이 있게 되었다. 네가 이렇게 나와 단 둘이 있어준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오직 너와 나만이 있는 곳. 적당히 뒹굴어져서 넌 담배, 난 낮잠을 자는 척, 대화는 많이 오가지 않았다.

그 후로 난 점심시간에 옥상에 올라가 있곤 했다. 생각보다 느긋한 느낌을 넌 마음에 들어 했다. 난 사실 네가 열쇠를 복사해 달랄까봐 조마조마했다. 네가 해달라고 했다면 난 잔뜩 귀찮은 척하면서도 해줬겠지만 네가 그런 요구를 하는 일은 없었다. 안도. 그곳이 너 혼자만의 공간이 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곳은 말하자면 네가 나를 찾아오는 장소였으니까. 네가 찾아오는 옥상에 언제나 내가 있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대단한 일이 일어났다. 물론 나에게만이겠지만. 그 일이 일어났던 건 교복 재킷을 입게 되었던 시기쯤이었는데. 난 그 어느 날의 점심시간에 옥상 바닥에 재킷을 깔아 팔을 쭉 펴고 누운 채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재킷을 입지 않은 네가 나타났고, 셔츠만으론 약간 추웠던 건지 팔짱을 끼고서, 내 왼편에 와서 누웠다.

그것도 내 왼팔에 머리를 싣고.

눈을 감은 네 얼굴이 바로 왼쪽에 있었다. 체온이 전해져왔다.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은 그렇게 따뜻한 것이었는지. 쌀쌀해서 옆에 누운 것뿐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네가 내 체온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솔직해질 것도 없이 매우 기뻤다. 내 옆에 눕는 걸 거리껴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 기뻤다. 난 다른 한쪽팔도 들어 널 내 품에 안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3학년들 센터 시험 후 어느 날의 옥상. 담배를 물고 불이 잘 들어오지 않는 라이터를 틱틱 켜고 있던 재킷을 입은 네가 문득 말을 꺼냈다.

"나 검도부 시합 가끔 도우러 갔었잖냐."

어.

"그쪽 주장이 날 좀 좋게 봐줘서 대우 나쁘지 않았거든."

어.

"말했나 모르겠는데 나 도장 쭉 다녔었어."

어. 곤도 놈이 말하는 거 듣고 알았어.

"그래서 검도에는 나름 애착도 있고. 도우러 가면 결과도 잘 내서 그런지 가끔 놀러가도 반겨주고 그랬거든."

응.

"그 주장 선배하곤 꽤 얘기도 잘 통하고 해서 나쁘지 않았는데."

그래.

"……."

라이터를 틱틱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잠시 아무 소리도 없었다. 아마 말을 고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선배를 어제 어쩌다 밖에서 봤는데 말이다."
"봤는데?"

그게 말이지. 그리고 넌 약간 뜸을 들였다.

"고백 받았다."

난 이때 등을 돌리고 누운 채로. 목에선 좀 졸린 소리가 나왔다.

"그래…. 그 주장 선배는 늘씬하게 잘 패줬냐?"
"어? 어…. 그러니까."

등 뒤에서 네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나 여자 친구 있어서…."
"그래?"

몸을 네 쪽으로 돌려 누웠다. 고개를 숙이고 다른 곳을 흘끔대는 네가 보였다. 난 히죽 웃었다.

"나도 너 좋아하는데 여자 친구 때문에 안 되겠네?"
"그거 가지고 금방 장난질이냐, 요녀석아."

넌 금세 날 째려보더니 발로 툭툭 내 팔을 찼다. 그리고 손으로 입가를 매만지다가 다시 나에게 말했다.

"사카타."
"어?"
"미안하다."

뭐가 미안한데?

"여자 친구 있다는 거 말 안 해서."
"그런 거 일일이 보고 안 해도 안 삐져, 요녀석아."
"그게 왠지 좀 말이지."

네가 씨익 웃는 게 보였다. 나도 씩 웃어주며, 내가 넌 줄 아냐, 난 너랑 달리 배포가 큰 사나이니까 그런 거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주었다.

그래.

그런 걸 신경 쓰고 있던 게 아니니까 걱정 마.




난 그 뒤로 장난처럼 너에게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때마다 빨개져서 신경질 내는 네가 주변에서도 재밌었는지 그런 장난을 치는 녀석들이 늘었다. 넌 그때마다 그만두라고 나에게 화를 냈지만 진지하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장난에 심각해지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했을 거다.

봄이 되고 반이 갈라졌다. 다른 반이 된 너와 나는 만날 일이 많지 않았다. 그 2학년 때 난 옥상에서 혼자 너와 같은 브랜드의 담배를 피우곤 했다.

그 다음 봄이 되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반으로 들어갈 때 곤도와 함께 갈색머리 신입생과 떠들고 있던 너를 보았다.

그리고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고.

다시 봄이 되었다.

네가 어디에 합격했는지는 듣지 못한 채 다른 지방의 대학에 들어갔다. 국문과였다. 타고난 붙임성 덕에 거기서도 난 얼굴이 넓었다. 내 적당한 성격이라든가 당분에 대한 집착이라든가 천연파마라든가 쓸데없이 긴 궤변이라든가 덕에 괴짜로 불렸다. 다들 날 재밌어했고 쉽게 친해졌다. 그만큼 족보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성적도 무난했다. 뚜렷하게 바라던 진로가 없던 차에 같이 교직을 듣자는 과 동기가 있어서 교직을 이수했다.

그리고 3학년 2학기. 현대국어 교생실습을 이 모교로 왔다. 그 옥상열쇠를 난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몇 년 만에 올라온 옥상은 여전히 넓고. 아무도 없고. 탁 트인 하늘. 가을인데도 점심때라 따스한 햇살. 마치 그때처럼.

쭉 피우고 있던 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연기 냄새에 네가 생각났다. 하지만 이 옥상 아래에 너는 없었다. 네가 옥상 문을 열고 찾아올 일도 없었다.

눈을 감고. 등 뒤의 철제문이 5년 만에 열리는 상상을 한다.

검은 눈꺼풀 막에 희미한 빛이 명멸한다. 태양을 닮은 붉은 빛이 조용히 움직이다 이내 사라진다. 막을 열어 눈에 태양을 담고 다시 닫는다. 연둣빛과 붉은빛을 내는 동그라미가 검은 막 옆으로 퇴장하면 다시 눈꺼풀을 열고 닫는다.

물론. 내가 눈을 깜박이며 울고 있다 해도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5년. 멀리 돌아. 다시 이곳에 돌아오고서야. 너를 좋아하는 것이 쓸모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이놈의 담배는 어떻게 끊을까. 그때의 체온은 어떻게 잊을까. 아까우니 옥상열쇠는 그냥 가지고 있자.

그제서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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